아메데 쿠르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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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메데 쿠르베는 1827년 프랑스 솜주 아브빌에서 태어나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해군 사관으로 복무하며 지구를 일주했다. 그는 해군 소령, 프리게이트 선장, 해군 선장으로 진급했으며, 1880년 누벨칼레도니 총독을 역임했다. 1883년 통킹 해안 해군 사단 사령관으로서 후에를 포격하고 안남을 프랑스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며, 청불전쟁에서 극동 함대를 지휘하여 마강 해전에서 승리하는 등 여러 전과를 올렸다. 쿠르베는 1885년 6월 11일 펑후 제도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리더십과 업적은 칭송받았고, 그의 이름을 딴 군함과 지명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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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 쿠르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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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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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27년 6월 26일 |
출생지 | 피카르디 아브빌 |
사망일 | 1885년 6월 11일 |
사망지 | 청나라 펑후 제도 마공 (타이완) |
소속 | 프랑스 |
복무 기간 | 1849년–1885년 |
최종 계급 | 해군 대장 |
소속군 | 프랑스 해군 |
지휘 | 극동 함대 |
주요 전투 | |
전투 | 청불 전쟁 투안 전투 선떠이 전투 푸저우 해전 기륭 전투 시푸 전투 진해 전투 펑후 제도 전역 |
훈장 | |
훈장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 오피시에 메다유 밀리테르 |
2. 초기 생애 및 경력
아메데 쿠르베는 1827년 프랑스 솜주 아브빌에서 태어나 9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교육받은 후 해군에 입대했다.
1849년부터 1853년까지 코르벳함 ''카프리시외즈''의 사관 후보생으로 복무하며 지구를 일주했고, 특히 중국 해안을 항해하며 훗날 활약할 무대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이후 레반트 해군 사단, 스미르나 등에서 복무하며 1856년 해군 소령으로 진급했다.
1864년부터 1866년까지 철갑함 ''솔페리노''에서 부관으로 복무했고, 1866년 프리게이트 선장으로 진급, 철갑 프리게이트 ''사부아''에 배치되었다. 1870년 파견선 ''탈리스만''의 선장으로 안틸레스 해군 사단에 배치되어 첫 독립 지휘를 맡았다. 1873년 해군 선장으로 진급, 1874년부터 1877년까지 올레롱 섬의 수중 방어 학교를 지휘했다. 1877년부터 1879년까지는 철갑함 ''리슐리외''에서 참모장으로 복무했다.
1880년 누벨칼레도니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1882년 프랑스로 돌아와 1883년 철갑함 ''바야르''를 기함으로 하는 ''디비시옹 나발 데세''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2. 1. 출생과 가족
아메데 쿠르베는 1827년 프랑스 솜주 아브빌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1] 아버지는 쿠르베가 9살 때 사망했다.[1]2. 2. 초기 군 경력
아메데 쿠르베는 1827년 아브빌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쿠르베가 9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그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교육을 받았다.1849년부터 1853년까지 쿠르베는 코르벳함 ''카프리시외즈''(''capitaine de vaisseau'' 로크마우렐)의 사관 후보생(''아스피랑'')으로 복무했다. ''카프리시외즈''는 이 기간 동안 지구를 일주했으며, 수개월 동안 중국 해안을 항해했는데, 이는 30년 후 그가 명성을 얻게 될 바다에 대한 첫 경험을 쿠르베에게 안겨주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그는 레반트 해군 사단에 배속된 브릭 ''올리비에''에 배치되었다. 1855년 12월, 스미르나에서 그는 ''메사제리 임페리얼'' 소속의 여객선 ''탕크레드''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 개입했으며, 이후 해군성에 의해 그의 행동이 칭찬받았다. 1856년 11월에 ''해군 소령''(lieutenant de vaisseau)으로 진급했다.
1864년부터 1866년까지 쿠르베는 2층 갑판 측면 철갑 전함 ''솔페리노''에서 ''에스카드 데볼루션''의 사령관인 부에-윌로메즈 제독의 부관이자 비서로 복무했다. 1866년 8월에 ''프리게이트 선장''(capitaine de frégate)으로 진급했으며, 북해 및 영국 해협 해군 사령관인 드 돔피에르 도르노이 제독의 참모장으로 철갑 프리게이트 ''사부아''에 배치되었다. 1870년 3월 그는 파견선 ''탈리스만''의 선장으로 안틸레스 해군 사단에 배치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기간 동안 그에게 작전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 이 배치는 그의 첫 번째 독립 지휘였다. 1872년 5월 프랑스로 돌아왔다.
1873년 초 쿠르베는 프리게이트 ''미네르브''의 부관으로 안틸레스로 돌아왔다. 1873년 8월에 ''해군 선장''(capitaine de vaisseau)으로 진급했다. 1874년 12월부터 1877년 1월까지 그는 보이아르빌 (올레롱 섬)의 수중 방어 학교(''école des défenses sous-marines'')를 지휘했다. 1877년부터 1879년까지 그는 철갑함 ''리슐리외''에 배치되어 다시 ''에스카드 데볼루션''의 총사령관인 드 돔피에르 도르노이 제독의 참모장으로 복무했다.
1880년 5월 쿠르베는 올리 제독의 후임으로 누벨칼레도니 총독이 되었다. 1882년 가을 프랑스로 돌아와 해군 장관인 베르나르 자우레기베리 제독으로부터 레반트 해군 사단을 지휘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1883년 1월 샤를 뒤클레르 내각이 아르망 팔리에르의 짧은 행정부로 교체되면서 자우레기베리가 해군 장관직에서 물러났고, 쿠르베는 대신 지중해에서 ''디비시옹 나발 데세''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883년 4월 그는 셰르부르에서 철갑함 ''바야르''에 기함을 게양했다.
2. 3. 안틸레스 및 북해 복무
1870년 3월, 쿠르베는 파견선 ''탈리스만''의 선장으로 안틸레스 해군 사단에 배치되었다. 이 배치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기간 동안 그에게 작전 기회를 제공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첫 독립 지휘였다. 그는 1872년 5월 프랑스로 돌아왔다.[1] 1873년 초, 쿠르베는 프리게이트 ''미네르브''의 부관으로 다시 안틸레스로 돌아왔다.[1]1866년 8월, 쿠르베는 ''프리게이트 선장''(capitaine de frégate)으로 진급하여 북해 및 영국 해협 해군 사령관인 드 돔피에르 도르노이 제독의 참모장으로 철갑 프리게이트 ''사부아''에 배치되었다.[1]
2. 4. 수중 방어 학교 지휘 및 에스카드 데볼루션 복무
1874년 12월부터 1877년 1월까지 쿠르베는 보이아르빌 (올레롱 섬)의 수중 방어 학교(''école des défenses sous-marines'')를 지휘했다.[1] 1877년부터 1879년까지는 철갑함 ''리슐리외''에 배치되어 ''에스카드 데볼루션''의 총사령관인 드 돔피에르 도르노이 제독의 참모장으로 복무했다.[1]3. 뉴칼레도니아 총독 (1880-1882)
4. 통킹 해안 해군 사단 사령관 (1883-1884)
쿠르베는 1883년 통킹에서 해군 부대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황제의 후계 다툼으로 혼란한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수도 후에를 포격하고 안남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삼았다.
1883년 6월, 쿠르베는 통킹 해안 해군 사단의 지휘를 맡아 통킹 만을 봉쇄하여 흑기군에 대한 무기와 탄약의 흐름을 차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883년 7월 하롱 베이에 도착한 쿠르베는 8월에 베트남 황제 뜨득의 죽음과 계승 위기에 대응하여 후에의 베트남 궁정을 압박하는 작전을 승인받았다. 8월 18일, 쿠르베의 해군 사단은 투언안 요새를 폭격했고, 8월 20일 투언안 전투에서 승리하여 베트남 궁정이 프랑스에 굴복하고 후에 조약을 체결하게 만들었다.[1]
4. 1. 통킹 해안 해군 사단 창설 및 임무
1883년 6월, 쿠르베는 '시험 해군 사단'(division navale d'essais)에서 전출되어 새로운 통킹 해안 해군 사단(division navale des côtes du Tonkin)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류용복의 흑기군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여 통킹(베트남 북부)에 보호령을 강요하려 했다. 흑기군은 중국으로부터 은밀히 무장과 물품을 공급받고 있었고, 새로운 해군 사단의 역할은 통킹 만을 봉쇄하여 흑기군에 대한 무기와 탄약의 흐름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통킹 해안 해군 사단에는 쿠르베가 지휘하던 지중해 사단의 철갑함 "바야르"와 "아탈란트"호, 그리고 알제에서 온 순양함 "샤토르노"호가 포함되었다. 쿠르베는 또한 어뢰정 2척(45호, 46호)을 받았으며, 통킹에 도착하면 코친차이나 해군 사단의 항해 선박을 인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쿠르베는 1883년 7월 하롱 베이에 도착했다.
8월, 베트남 황제 뜨득의 죽음과 그에 따른 계승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프랑스 정부는 후에의 베트남 궁정을 강압하는 작전을 승인했다. 8월 18일, 쿠르베의 해군 사단은 향수의 강 입구에 있는 투언안 요새를 폭격했으며, 8월 20일 투언안 전투에서 해군과 해병대의 상륙 부대가 베트남 방어선을 돌파하여 요새를 점령했다. 프랑스가 원할 때마다 후에를 점령할 수 있게 된 쿠르베의 승리로 인해 베트남 궁정은 프랑스 권위에 굴복하여 통킹에서 프랑스 보호령을 인정한 후에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1]
4. 2. 투언안 전투와 후에 조약 (1883)
1883년 6월, 쿠르베는 "시험 해군 사단"(division navale d'essais)에서 전출되어 새로운 통킹 해안 해군 사단(division navale des côtes du Tonkin)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류용복의 흑기군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여 통킹(베트남 북부)에 보호령을 강요하려 했다. 흑기군은 중국으로부터 은밀히 무장과 물품을 공급받고 있었고, 새로운 해군 사단의 역할은 통킹 만을 봉쇄하여 흑기군에 대한 무기와 탄약의 흐름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통킹 해안 해군 사단에는 쿠르베가 지휘하던 지중해 사단의 철갑함 "바야르"와 "아탈란트"호, 그리고 알제에서 온 순양함 "샤토르노"호가 포함되었다. 쿠르베는 또한 어뢰정 2척(45호, 46호)을 받았으며, 통킹에 도착하면 코친차이나 해군 사단의 항해 선박을 인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쿠르베는 1883년 7월 하롱 베이에 도착했다.1883년 8월, 베트남 황제 뜨득의 죽음과 그에 따른 계승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프랑스 정부는 후에의 베트남 궁정을 강압하는 작전을 승인했다. 8월 18일, 쿠르베의 해군 사단은 향수의 강 입구에 있는 투언안 요새를 폭격했으며, 8월 20일 투언안 전투에서 해군과 해병대의 상륙 부대가 베트남 방어선을 돌파하여 요새를 점령했다. 프랑스가 원할 때마다 후에를 점령할 수 있게 된 쿠르베의 승리로 인해 베트남 궁정은 프랑스 권위에 굴복하여 통킹에서 프랑스 보호령을 인정한 후에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1]
5. 통킹 원정군 사령관 (1883-1884)
1883년 10월, 쿠르베는 통킹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응우옌 왕조의 수도 후에를 포격하여 안남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4]
1883년 12월, 쿠르베는 선떠이를 공격했다. (자세한 내용은 선떠이 전투 참조)
1884년, 쿠르베는 중국 주둔 프랑스군 전체를 지휘하여 Escadre d'Extrême-Orient|극동 함대프랑스어를 조직하고 청불 전쟁을 지휘했다. 그는 마강 해전에서 청나라 복건함대를 격파하고 복주선정국을 파괴했다. 또한, 타이완을 침공하여 봉쇄하고, 펑후 제도를 점령했으며, 타이완 북부의 지룽을 1884년 10월 1일부터 1885년 7월까지 점령했다.[4]
쿠르베는 청나라 흑기군과의 강화를 정한 톈진 조약이 체결된 지 이틀 후인 1885년 6월 11일에 타이완에서 사망했다.[4]
5. 1. 선떠이 전투 (1883)
1883년 12월, 쿠르베는 선떠이를 공격했다. 선떠이 전역은 프랑스가 통킹에서 치른 전투 중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선떠이에서 중국과 베트남 부대는 방어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지만, 류융푸의 흑기군은 도시를 지키기 위해 격렬하게 싸웠다.[4]12월 14일, 프랑스는 푸사에 있는 선떠이 외곽 방어 시설을 공격했으나,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격퇴당했다. 이 패배를 이용하여 류융푸는 같은 날 밤 프랑스군 진지를 공격했지만, 흑기군의 공격 역시 참담하게 실패했다. 12월 15일에 병력을 재정비한 쿠르베는 12월 16일 오후에 다시 선떠이의 방어 시설을 공격했다. 이번 공격은 포병의 철저한 준비를 거쳤으며, 방어군이 지쳐 쓰러진 후에야 감행되었다.[4]
오후 5시, 외인부대 대대와 해병 기총병 대대가 선떠이 서쪽 문을 점령하고 시내로 진입했다. 류융푸의 수비대는 성채로 물러났고, 몇 시간 후 어둠을 틈타 선떠이를 탈출했다. 쿠르베는 목표를 달성했지만, 상당한 대가를 치렀다. 선떠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83명이 사망하고 320명이 부상당했다. 선떠이에서의 전투는 흑기군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으며, 일부 관찰자들은 이를 통해 흑기군이 심각한 전투 병력으로서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평가했다.[4]
6. 극동 함대 사령관 (1884-1885)
1884년, 쿠르베는 중국에 주둔한 프랑스군 전체를 지휘하여 를 조직하고 청불 전쟁을 맞았다. 같은 해 마강 해전에서 청나라의 복건함대를 격파하고 복주선정국을 파괴했다. 또한 타이완을 침공하여 봉쇄하고, 펑후 제도를 점령했으며, 타이완 북부의 지룽을 1884년 10월 1일부터 1885년 7월까지 점거했다.[3]
쿠르베는 청나라 흑기군과의 강화를 정한 톈진 조약이 체결된 지 이틀 뒤인 1885년 6월 11일에 타이완에서 사망했다.[3]
6. 1. 극동 함대 창설
1884년 6월, 박레 매복 소식이 전해지자 통킹 해안 해군 사단과 극동 해군 사단이 통합되어 가 창설되었다. 이 함대는 청불전쟁 기간 동안 존속되었으며, 쿠르베가 지휘하고 세바스티앙 레스페 제독이 부사령관을 맡았다.[4]쿠르베의 함대는 초기에 철갑선 ''바야르''(Bayard, 기함), ''아탈란트''(Atalante), ''라 갈리소니에르''(La Galissonnière), ''트리옹팡트''(Triomphante), 순양함 , , 및 , 경 프리깃함 ''아멜랭''(Hamelin)과 ''파르스발''(Parseval), 포함 ''랭스''(Lynx), ''비페르''(Vipère), ''뤼탱''(Lutin), ''아스피크''(Aspic), 수송선 ''드라크''(Drac)와 ''손''(Saône) 및 어뢰정 45호와 46호를 포함했다. 1884년 7월, 쿠르베는 함대 일부를 푸저우에 집결시켜 복건함대(중국의 4개 지역 함대 중 하나)와 복주선정국을 위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4]
6. 2. 푸저우 해전 (1884)
박례 매복 사건에 대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프랑스와 중국 간의 협상이 8월 중순에 결렬되었고, 8월 22일 쿠르베에게 푸저우에서 중국 함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1884년 8월 23일 푸저우 해전(파고다 앵커리지 해전이라고도 함)에서 쿠르베의 극동 함대는 열세인 중국 복건함대를 전멸시키고 푸저우 해군 조선소를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복건함대의 기함인 코르벳 ''양우''를 포함하여 9척의 중국 함선이 1시간도 안 되어 침몰했다.[5] 중국 측 사상자는 3,000명에 달했을 수 있지만, 프랑스 측 사상자는 미미했다.[5] 쿠르베는 이후 민강을 따라 성공적으로 후퇴하여 프랑스 함대를 민안과 진파 협곡을 통과시키면서 여러 중국 해안 포대를 뒤에서 파괴했다.[5]
6. 3. 지룽·단수이 전투와 포모사 봉쇄 (1884)
1884년 9월 말, 쿠르베는 극동 함대를 동원하여 프랑스 원정군을 포모사(타이완) 북부의 지룽과 단수이에 상륙시키는 것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매우 불만스러워했다. 쿠르베는 포모사에서의 작전에 강력히 반대하며, 대신 중국 북부 해역에서 뤼순이나 웨이하이웨이를 점령하는 방안을 해군성에 제출했다. 그는 주중 프랑스 공사 쥘 파트노트르의 지지를 받았지만, 두 사람 모두 거부당했다.[6]10월 1일, 베르토-레빌랭 중령은 1,8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지룽에 상륙하여, 중국군을 주변 언덕에 구축된 강력한 방어 진지로 후퇴시켰다. 프랑스군은 지룽 밖으로 진격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적었다. 한편, 10월 2일, 레페스 제독은 효과 없는 해상 포격을 가한 후, 10월 8일, 자신의 함대 상륙 부대 소속 수병 600명을 이끌고 단수이에서 중국군의 방어 시설을 공격했으나, 쑨카이화(孫開華) 푸젠성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에 의해 결정적으로 격퇴당했다. 프랑스는 이제 장기적인 지룽 작전에 묶이게 되었고, 쿠르베의 함대는 효과 없는 포모사 봉쇄에 묶여있었다.
6. 4. 시푸만 해전과 전해 해전 (1885)
수개월간의 소강 상태를 겪은 후, 쿠르베는 1885년 봄에 일련의 승리를 거두었다. 쿠르베의 함대는 전쟁 시작 이후 전력이 대폭 강화되어 1884년 10월보다 훨씬 많은 함선을 보유하게 되었다. 1885년 2월 초, 쿠르베 함대의 일부는 중국 남해 함대의 일부가 대만 해협 봉쇄를 뚫으려 시도하려는 위협에 맞서기 위해 지룽을 떠났다. 2월 11일, 쿠르베의 임무 부대는 시푸만 인근에서 중국 함대에서 가장 현대적인 함선 중 하나인 순양함 ''카이지'', ''난첸'', ''난루이''와 프리깃함 ''위위안'', 복합 슬루프 ''청칭''을 만났다. 중국 함선들은 프랑스 함대가 접근하자 흩어졌고, 세 척의 순양함은 탈출에 성공했지만, 프랑스군은 ''위위안''과 ''청칭''을 시푸만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2월 14일 밤, 시푸만 해전에서 프랑스의 과감한 어뢰 공격으로 두 척의 배가 파괴되었다. ''위위안''은 프랑스의 스파 어뢰에, ''청칭''은 ''위위안''의 포격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두 척의 배는 이후 중국군에 의해 자침되었다.[7]쿠르베는 3월 1일, 닝보 항구 근처의 전해 만에서 다른 중국 군함 4척과 함께 피신해 있던 ''카이지'', ''난첸'', ''난루이''를 찾아내며 이 성공을 이어갔다. 쿠르베는 중국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결국 적 함선을 교전 기간 동안 그곳에 묶어두기 위해 만 입구를 지키기로 결정했다. 3월 1일 프랑스 순양함 Nielly|닐리프랑스어와 중국 해안 포대 사이의 짧고 결정적이지 않은 교전으로 닝보 방어를 담당했던 중국 장군 오양리젠이 소위 전해 해전을 방어 승리로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8]
6. 5. 쌀 봉쇄 작전 (1885)
1885년 2월, 중국의 외교적 압력에 따라 영국은 1870년 외국인 용병법 조항을 발동하여 홍콩과 극동의 다른 항구를 프랑스 군함에 폐쇄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쿠르베에게 양쯔강에 '쌀 봉쇄'를 시행하도록 명령하여, 중국 북부의 심각한 쌀 부족을 유발함으로써 청나라 조정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 했다. 쌀 봉쇄는 상하이에서 해상으로 쌀을 운송하는 것을 심각하게 방해했고, 중국인들로 하여금 육로로 쌀을 운반하도록 강요했지만, 봉쇄가 중국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전에 전쟁이 끝났다.[3]6. 6. 펑후 제도 점령 (1885)
1885년 3월 초 기륭에서의 프랑스의 주요 승리로 쿠르베는 기륭 주둔군으로부터 해병대대와 해병 포병대를 떼어내 3월 말 페스카도르스 제도를 점령할 수 있었다. 쿠르베는 직접 작전을 지휘했으며, 이 짧은 식민지 원정은 프랑스 해군 함선과 해병대에 의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치러졌다. 전략적으로, 페스카도르스 원정은 중요한 승리였으며, 중국군이 포르모사에서 추가로 병력을 증강하는 것을 막았을 것이지만, 전쟁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 늦게 이루어졌다. 방보 전투 (1885년 3월 24일)에서의 프랑스 패배와 그에 따른 랑선 철수 소식이 전해지면서 극동 함대를 사용하여 보하이만에 상륙하려는 계획은 취소되었고, 쿠르베는 페스카도르스 제도 마궁에 최소한의 주둔군만 남겨두고 통킹 원정군을 증원하기 위해 기륭을 철수하려던 찰나에 1885년 4월에 적대 행위가 종식되었다.[9]7. 사망과 장례 (1885)
쿠르베는 청나라 흑기군과의 강화를 정한 톈진 조약이 체결된 지 이틀 후인 1885년 6월 11일에 타이완에서 사망했다.[10]
7. 1. 사망
1885년 6월 11일, 톈진 조약 체결 이틀 후 쿠르베는 타이완에서 사망했다.[10] 1885년 7월까지 펑후 제도를 점령했던 프랑스군 수십 명과 함께 콜레라로 사망했다. 1885년 4월에 이미 심한 이질을 앓았던 그는 두 달 동안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6월 8일, 콜레라로 사망한 해군 보병 장교 ''부사관'' 데르의 장례 행렬에서 펑후 제도의 뜨거운 태양 아래 머리를 드러내고 걸은 것이 치명적인 쇠약의 원인이었다. 1885년 6월 11일 밤, 마궁 항구의 기함 바야르 호에서 사망했으며, 세바스티앵 레스페스 제독이 극동 함대 지휘를 이어받아 6월 13일 마궁에서 추도식을 주재했다.[10]6월 23일, ''바야르'' 호는 30척이 넘는 프랑스 군함의 19발 예포를 받으며 마궁을 떠나 쿠르베의 시신을 파리 국장으로 운구했다. 싱가포르, 마헤(세이셸), 아덴, 수에즈, 알렉산드리아, 보네 등에서 두 달간 귀국 항해를 한 ''바야르'' 호는 8월 24일 프로방스 해안에 도착, 레 살랭 디에르 항구에서 프랑스 지중해 함대에 합류했다. 8월 26일 쿠르베의 관을 육지로 운구하여 특별 열차로 파리로 이송했다. 아비뇽과 파리행 경로의 여러 역에서 애국심에 불타는 군중들이 프랑스 최고 제독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길가에 늘어섰다. 8월 27일 레쟁발리드에서 국장이 거행되었고, 앙제 주교이자 쥘 페리의 통킹 식민지 정복 정책을 열렬히 지지했던 샤를 에밀 프레펠이 장례 연설을 했다. 쿠르베의 시신은 기차로 피카르디의 고향 아브빌로 옮겨져 9월 1일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프레펠 주교의 추가 연설에 이어, 새로 임명된 해군 장관 샤를-외젠 갈리베르 제독이 아브빌의 생 뷜프랑 대학 교회에서 마지막 찬사를 보냈다.[11]


7. 2. 국장과 추모
프랑스는 1885년 7월까지 펑후 제도를 점령했다. 쿠르베와 수십 명의 다른 프랑스 군인과 해군은 이 짧은 프랑스 점령 기간 동안 콜레라로 사망했다.[10] 그는 1885년 6월 11일 밤, 마궁 항구에서 기함 ''바야르'' 호에서 사망했다. 세바스티앵 레페스 제독이 극동 함대의 지휘를 맡았고, 6월 13일 마궁에서 쿠르베를 위한 추도식을 주재했다.[10]
6월 23일, ''바야르'' 호는 30척이 넘는 프랑스 군함의 19발의 예포를 받으며 마궁을 떠나 쿠르베의 시신을 파리에서 국장으로 치르기 위해 프랑스로 가져갔다. 싱가포르, 마헤(세이셸), 아덴, 수에즈, 알렉산드리아, 보네 등에서 정차하는 두 달간의 프랑스 귀국 항해 끝에 ''바야르'' 호는 8월 24일 프로방스 해안에 도착하여 레 살랭 디에르 항구에서 프랑스 지중해 함대에 합류했다. 쿠르베의 관은 8월 26일 의식적으로 육지에 내려져 특별 열차를 타고 파리로 옮겨졌다. 아비뇽과 파리행 경로의 다른 역에서 애국심 넘치는 군중들이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제독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길을 따라 늘어섰다. 쿠르베의 국장은 8월 27일 레쟁발리드에서 거행되었다. 장례 연설은 앙제 주교이자 통킹에서 쥘 페리의 식민지 정복 정책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 중 한 명인 샤를 에밀 프레펠이 낭독했다. 쿠르베의 시신은 기차로 고향인 피카르디의 아베빌로 옮겨졌고, 9월 1일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프레펠 주교의 추가 연설에 이어, 최근 임명된 해군 장관인 샤를-외젠 갈리베르 제독이 아베빌의 생 불프랑 대학 교회에서 쿠르베에 대한 마지막 찬사를 전했다.[11]
8. 평가 및 유산
쿠르베는 신중하고 체계적인 지휘관으로, 전투에 부하들을 투입하기 전에 승리할 가능성을 신중하게 계산했다. 가능한 모든 경우에 프랑스군의 사상자를 최소화하려 노력했으며, 여러 차례 이전에 명령했던 공격을 취소하기도 했다. 그는 매우 사적인 인물이라 부하 장교와 병사 모두에게 친밀함을 억제했지만, 동시에 깊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극동 전대의 한 수병은 그가 인기가 있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쿠르베 제독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는 헛되이 부하들을 죽이지 않습니다!"[12]
쿠르베는 1883년 통킹 해군 부대 지휘관이 되어 응우옌 왕조베트남의 수도 후에를 포격하여 안남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1884년에는 프랑스군 전체를 지휘하며 청불 전쟁을 치렀고, 마강 해전에서 청나라의 복건 함대를 격파하고 복주선정국을 파괴했으며, 타이완을 침공하고 봉쇄하여 펑후 제도를 점령하는 등 식민지 확장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쿠르베는 톈진 조약이 체결된 지 이틀 후인 1885년 6월 11일에 타이완에서 사망했다. 그의 고향 아브빌에는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이 있으며, 프랑스 해군에는 그의 이름을 딴 군함이 세 척 있었다.
8. 1. 리더십
쿠르베는 신중하고 체계적인 지휘관으로, 전투에 부하들을 투입하기 전에 승리할 가능성을 신중하게 계산했다. 그는 가능한 모든 경우에 프랑스군의 사상자를 최소화하려 노력했으며, 여러 차례 이전에 명령했던 공격을 취소하기도 했다.[12] 그는 매우 사적인 인물이라 부하 장교와 병사 모두에게 친밀함을 억제했지만, 동시에 깊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극동 전대의 한 수병은 그가 인기가 있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쿠르베 제독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는 헛되이 부하들을 죽이지 않습니다!"[12]토마지 대령은 1883년 프랑스 정부가 톤킨 해군 사령관으로 쿠르베를 선택한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쿠르베의 리더십 방식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
> 당시 56세였던 쿠르베 소장은 놀랍게도 어떤 군사 작전에도 참여한 적이 없었지만, 빠른 승진을 누렸다. 그는 크림 전쟁 동안 레반트 지역에 있었고, 이탈리아 전쟁, 중국 및 멕시코 원정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870년과 1871년에는 서인도 제도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해군 경력은 매우 활발했다. 그는 세계의 모든 대양을 항해했고, 수많은 지휘를 수행했으며, 일류 전술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해군 과학의 한 분야에 특화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천문학, 포술부터 엔진, 어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깊이 연구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모든 것에 정통한, 균형 잡힌 장교의 전형이었다.
>
> 그는 지혜만큼이나 신중했고, 지능만큼이나 도움이 되었다. 그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결정을 신중하게 저울질했으며, 결정을 내린 후에는 굳건한 에너지로 실행했다. 그의 명령은 간결하고 명료했으며, 그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칭찬에 인색했지만 공정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의 훌륭한 봉사를 인정했다. 그 결과 그는 부하들로부터 최고의 역량을 끌어낼 수 있었고, 부하들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지휘하기 위해 태어난 드문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어떤 경력에서도 그는 해군에서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우월함과 권위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상황은 그의 훌륭한 리더십 자질을 부각시켰을 것이다.[13]
피에르 로티라는 필명으로 출판된 여러 인기 기사에서 톤킨에서 쿠르베의 지휘를 받은 자신의 경험을 묘사한 ''함장'' 루이-마리-줄리앙 비오(1850–1923)는 쿠르베의 더 인간적인 면을 다음과 같이 파악했다.
> 그는 수병과 병사들의 생명에 매우 높은 가치를 두었고, 2년 후에는 멀리 떨어진 프랑스에서 그들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프랑스 피 한 방울을 흘리는 것을 아까워했다. 그의 전투는 사전에 매우 정밀하게 계획되고 실행되었으며, 그 결과는 종종 치명적이었지만, 항상 우리 측의 매우 적은 손실로 얻어졌다. 전투에서 그는 엄격하고 굽힐 줄 몰랐지만, 전투가 끝나면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고, 매우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으며, 섬세하고 슬픈 미소를 지으며 병원을 순찰했다. 그는 부상자들, 심지어 가장 미천한 사람들의 모습도 보고 그들과 악수하고 싶어했으며, 그들은 그의 방문에 위안을 받고 더 행복하게 죽었다.[14]
8. 2. 식민지 확장에 대한 비판적 시각
아메데 쿠르베는 1883년 통킹 해군 부대 지휘관이 되어 응우옌 왕조베트남의 수도 후에를 포격하여 안남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1884년에는 프랑스군 전체를 지휘하며 청불 전쟁을 치렀다. 쿠르베는 1884년 마강 해전에서 청나라의 복건 함대를 격파하고 복주선정국을 파괴했으며, 타이완을 침공하고 봉쇄하여 펑후 제도를 점령했다. 또한 타이완 북부의 지룽을 1884년 10월 1일부터 1885년 7월까지 점령했다.8. 3. 쿠르베를 기리는 것들
대만 남부 지룽의 따사완은 쿠르베가 이끌었던 프랑스군의 상륙지이며, 일제 강점기에는 ‘쿠르베 해변’이라는 해변이 있었다.[15] 쿠르베의 고향인 아브빌의 옛 건초 시장 광장(Place du Marché-au-Blé)은 1885년 7월, 쿠르베의 사망 소식이 프랑스에 전해진 직후 시 당국에 의해 아미랄 쿠르베 광장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알제리의 젬무리 마을은 1886년에 쿠르베로 개명되었고, 1962년까지 그 이름을 유지했다. 19세기 말에는 쿠르베의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동상이 광장 중앙에 세워졌다. 이 동상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의 파괴적인 폭격으로 손상되었다.프랑스 해군의 세 척의 군함이 아미랄 쿠르베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철갑선 (''쿠르베'', 1882년부터 1909년까지 운용)
- 전함 (''쿠르베'', 1913년부터 1944년까지 운용)

- 현재 현역으로 운용 중인 현대식 스텔스 프리깃 ''쿠르베 (F 712)''
9. 훈장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 기사 (1857년 10월 22일)
- * 장교 (1868년 12월 30일)
- * 사령관 (1879년 7월 23일)
- * 그랑 오피시에 (1883년 12월 20일)
- 군사 훈장 (1884년 9월 13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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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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